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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선행연구 요약_전주희 2018-12-13 17: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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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이론학교] 선행연구 요약 | 20181213 | 전주희


1) 주제 

상징적 법이론 비판 : 억압과 저항의 지형을 다시 그리기. 


페미니즘적 ‘주체’를 가정하지 않은 정치를 사유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범주들은 무엇인가? 그에 앞서 행위 뒤에 행위자를 전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근대적 주체 개념을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현대 정치철학의 일반화된 주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젠더 트러블>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지나치게 익숙한 인식론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오늘날 억압과 배제를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들 중 버틀러의 이론은 ‘법’을 중심적으로 사유하는 한다는 점에서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버틀러가 비판해 마지 않았던 “탈현실화된 미학양식”으로서의 저항이나 존재론적이고 윤리적인 태도의 전환으로 정치를 환원해버리는 시도들에 대비해, 정치의 문제를 “구체적 정세에 대한 구체적 개입”(알튀세르)의 문제로 사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버틀러가 표명하고 있는 “법의 위치변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억압과 저항의 지형을 어떻게 다시그리기를 시도하고자 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선행논문 요약.

 

게일 루빈이 <여성거래>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여성이 사회의 기원에서부터 억압되었거나 배제되었다는 ‘억압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추상적인 인간, 그래서 성별 없는 인간 주체를 전제한 근대의 사회계약론적 기획을 비판하며, 모든 인간사회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특정한 생산 체계임을 주장한다. 이때의 생산이란 생산과 함께 이뤄지는 배제, 혹은 배제를 포함한 생산이며, 이에 따라 이러한 생산체계는 특정한 금지의 메커니즘을 포함한다. 루빈은 이러한 차원에서 근친상간의 금기가 특정한 사회를 생산하며, 그것은 동성애적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면서 생산하는 이성애 관계이다. 

그런데 여성이 교환된다는 것은 자칫 여성에게 아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 수동적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여성들은 청혼을 묵인함으로서 교환이 일어나도록 촉발하거나 허락할 수 있다. 다만 여성에게 부여되지 않은 것은 교환의 성격 자체이다.(111) 

그러니까 루빈이 “성적 체계들의 정치경제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은 이 부분이다. 특정한 사회가 생산될 때, 이것은 특정한 섹슈얼리티를 생산하면서 동시에 억압한다. 그런데 이 억압은, 이 억압의 지속은 어떻게 가능한가? 

루빈은 권리의 비대칭적 할당에 대해 언급하는데, 사회가 ‘생산’되었을 때, 그리고 교환이 이뤄질 때, 그것이 가능한 것은 권리들의 공유이다. 다만 이러한 권리는 남성들의 권리와 여성들의 권리로 비대칭적으로 구성된다. 즉 여성이 교환됨으로써 형성되는 것은 친족 체계뿐만 아니라 권리들의 순환을 통해 권리가 불균등하게 할당된다. 

근대의 정치적 기획은 권리의 평등이었다. 루빈이 언급한 권리의 순환과 불균등한 할당은 권리의 문제를 개인 대 전체의 문제로 사유하는 것을 넘어 권리가 상호 교섭하고 협상해야할 항목이며, 이를 둘러싼 정치의 문제를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루빈의 권리에 대한 짧은 언급은 다소 모호하다. 마치 ‘여성 거래’의 효과로서 비대칭적 권리들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여성거래’라는 일종의 법은 권리 이전에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루빈이 법에 대해 명시적으로 정의한 바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빈에게 ‘법’은 상상적인가 상징적인가. 그리고 법과 권리, 나아가 억압의 설정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트러블>은 하나의 탁월한 법 이론이기도 하다. 통상적인 학문의 범주로서 법이론이 아니라, 정치를 사유함에 있어서 법과 억압의 관계를 발본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정치철학 안에서 법을 재사유한다. 

이것은 레비스트로스와 라깡에 의해 구축된 상징적 법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임과 동시에 억압을 불변하는, 안정된 자리에 위치짓게 한 다음 전복의 기획을 수행하려는 페미니즘 이론들이 갖는 ‘아버지 법’과의 모종의 공모관계를 해체하려는 시도로 나아간다. 

이러한 문제는 버틀러에게 왜 이토록 중요한가?

그것은 성문화된 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권력의 생산성이다. 그러나 위티그가 지적했고, 테레사 드 로레티스가 다시금 확인했듯이, 권력은 생산적이면서 동시에 억압적이다. 즉 자유로운 주체의 생산은 늘 억압의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금기’의 바깥을 사유하지 못하게 하거나 최소한 비가시화하게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주체는 그런 한에서 법 안에서 생산된다. 

이것은 배제의 문제를 다시금 사유할 수 있게 하는데, 통상 ‘보이지 않는자’ ‘목소리 없는 자’로 형상화되는 배제는 실상 우리가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절대적인 인식불가능성을 표시하지 않는다. “기존 문화형식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고 해서 꼭 그것이 그런 형식의 인식 가능성의 매트릭스에서 배제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주변화된 것으로서 두려움의 대상이나, 최소한 사회적 허가의 손실을 요구하는 문화적 가능성이다. 사실상 이성애자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가능한 사회적 정체성을 잃고, 어쩌면 근본적으로 덜 허가된 정체성을 획득한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따라서 완전히 문화 안에 있지만 지배문화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232) 

따라서 억압의 한 형태인 배제는 법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의 내부면에 달라붙어 있다. 동시에 그것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법의 외부면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어떠한 권리의 차원이 할당되어 있으며, 특히 어떤 권리가 손상된 채로 할당되어 있을까?

버틀러는 <젠더트러블>에서 수행성에 주목하며, 이러한 수행성의 차원에서 법의 위치변경이 가능한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실용주의적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배제의 차원 혹은 억압의 차원을 권리의 문제와 함께 사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배제나 억압은 권리의 모든 박탈을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루빈이 지나치면서 언급한 권리의 불균등한 배분을 통해 여전히 법을 욕망하는 주체로 주체화되는지를 분석해야 하며, 이때만에 가장 억압받는자가 곧 저항의 주체가 된다는 자동적 승인을 무효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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