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보기
제목선행연구요약_길혜민2018-12-13 19:51:48
작성자
첨부파일선행연구요약_길혜민(20181213).hwp (33.5KB)

1213. 길혜민

 

<선행연구 요약>

테레사 드 로레티스, <젠더의 테크놀로지>

주디스 버틀러 , 「1-5 정체성, 성, 본질의 형이상학」,『젠더 트러블』

 

젠더를 재현하기는 페미니즘 비평에서 논쟁적으로 다뤄지는 주제다. 여성에 대한 재현은 그간 남성중심적 시각으로, 시선을 받는 대상으로서 재현된 여성을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다루어져 왔다. 뿐만 아니라 창작자가 여성이 되거나 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재현하려는 여성이 있다 하더라도 오랜 기간 대상화 된 여성으로서의 재현물에 대한 비판의 지점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이야기 되었다. 젠더를 재현한다는 것은 이리가레나 위티그가 이성애 중심주의(남성중심적)적 섹스-젠더 체계를 비판하면서 알렸던 남성이 아닌 존재로 취급된 여성을 단순화하여 물신화하는 것일까. 오로지 섹스만이 여성이라거나, ‘보편이 아닌 것이 여성이라는 식의 논쟁을 넘어설 수 있는 재현에 대한 이론적 접근법은 없는가에 대해 타진하려는 것이 앞으로 이 글이 나아갈 방향이다.

본 글은 테레사 드 로레티스의 젠더의 테크놀로지에 제시된 스페이스 오프(space-off)’ 개념을 이해하면서 로레티스가 언급했던 섹스-젠더체계의 안과 밖에 동시에 상관할 수 있는 개념으로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에서 니체를 인용하여 말했던 행위, 수행, 과정 뒤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행위자는 그 행위에 부가된 허구에 불과하다. 행위만이 전부이다”(131)라는 젠더의 수행성을 도입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이론의 접합은 재현이 스테레오타입을 쫓는다라는 도식적인 비판을 넘어서기 위한 이론적 증명작업을 위함이다.

로레티스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전유하며 젠더는 재현하면서 구성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고 했지만 로레티스는 이데올로기의 바깥이 없다는 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그녀가 보기에 젠더는 이데올로기(젠더 이데올로기)의 주요한 심급이다. 만약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볼 수 있다면 그건 이데올로기의 외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그 가능성은 과학적 인식에 있지만, 로레티스에게 있어서 그에 버금가는 것은 페미니즘 주체의 존재이다. 이데올로기의 주요 심급인 남성중심성의 섹스-젠더 체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 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페미니즘은 (남성중심일 수밖에 없는)이성애적 이데올로기와 공모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젠더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페미니즘을 재현하면서 구성할 수 있었지만 여기에는 이성애적 이데올로기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들이 호명되지 못 했다.

글의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겠지만 로레티스의 이 글은 알튀세르만이 아니라 푸코의 성의 테크놀로지(<성의 역사)>’의 아이디어를 참고하고 있기도 하다. 성의 장치로서 1970-80년대의 비평의 대상이었던 영화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작동하는 하나의 장치로 다뤄지기도 했었던 것이다. 권력-앎이라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작용 속에서 재현되는 여성은 재현불가능(한 여성)을 포함하고 있다. 금지하면서 생산하는 것은 재현가능한 여성이면서 재현 불가능한 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장치를 비판하며 젠더를 다르게 상상하고, 젠더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젠더를 (재 또는 탈)구성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이론의 전제에 깔려있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의하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페미니즘의 젠더 구성은 이데올로기 바깥과 안에 상관적일 수 있고자 한다. 그리고 그 바깥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이라는 있을 법한 것으로 셈치는 허구의 개념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영화 이론에서의 스페이스 오프라는 용어를 끌어온다. 이는 영화에서는 스크린의 사각지대이지만 여기에서는 담론의 사각지대’, 또는 그 담론이 재현하는 것의 스페이스 오프다. 스페이스 오프란 헤게모닉한 담론의 주변주에 위치한 공간, 제도들의 작음 틈, 권력-앎 장치의 균열에 기입된 사회적 공간이다. 이것은 젠더의 다른 구성의 조건, 주체성과 자게재현의 차원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제기될 수 있는 곳이다. “재현, 담론, 섹스-젠더 체계에 의해 그 재현, 담론, 섹스-젠더 체계 안에 재현된 공간으로부터 암시는 되지만 보이지는 않는 공간으로의 이동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스페이스 오프로의 이동은 젠더 이데올로기 안에 있으나 호명되지 못 했거나 무성음으로 처리되었던 존재를 재현할 수 있게 한다. 이들을 이데올로기 안에 존재함을 인정하면서 젠더 체계와 페미니즘적 주체를 재구성할 수 있다면 재현은 이성애 중심주의적인 것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이론적인 구성은 인간젠더에 대한 일관성의 범주를 기각하면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버틀러는 “‘사람이란 젠더의 인식 가능성이라는 합의된 기준에 따라 젠더가 될 때에만 비로소 파악된다”(114)라고 하는데 이를 조금 더 정리하면 사람이란 정해진 젠더를 가졌기에 인식 가능한 존재에게 부여되는 호명이 될 수 있다. 시간성에 힘입어 생각을 해보면 시민(인간=이성애자남성)권의 범주는 변해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속적 본질로서의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담론의 구성물이면서 강제적으로 주어지는(동시에 박탈시키는) 이름인 것이다. “젠더는 명사가 아니며, 자유롭게 떠도는 일군의 속성도 아니”(130)라고 했던 버틀러의 젠더에 대한 사유는 스페이스 오프에서 재현될 수 있는 수행성으로서의 범주와 나란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수행성으로서의 젠더(또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변용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은 자기자신에 대한 서술을 바꿔가는 자기재현을 읽어나가기 위한 발판이다. 이를테면 젠더 이데올로기 안에서 피해자인 여성은 스페이스 오프의 자리에 있던 때가 있었다. 이들을 재현하기란 쉽지 않은데 스페이스 오프로서의 성폭력 피해자인 여성이 말하고 있는 장면은 먼저 프로이트의 여성 히스테리 사례에서 나타난다. 스페이스 오프로 처리된 여성 피해자의 말하기는 주디스 허먼의 책 『트라우마』에서 나타난다. 여성적인 증상으로 설명되었던 히스테리는 여성의 여성성을 구성하는 재현이 아니라 (성폭력)피해자성을 감추는 서사라는 것이 주디스 허먼의 명석한 지적일 것이다. 이들은 (도라와 같이)‘인간이면서 안정적인 젠더 이데올로기의 구성 안에서만 재현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이데올로기 안에서 어떤 서사는 재현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재현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이 페미니즘적 주체로 호명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들은 생존자의 언어를 통해 재현될 수 있다. 젠더 이데올로기 안에서의 젠더에 부합된 일관성이 작동하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일관성이 파열되었다는 것은 일관성이 존재했다는 뜻일까. 그게 아니라면 일관성이야말로 구성된 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오로지 행위가 있을 뿐이라는 버틀러의 말처럼 오로지 행위만이 있다면 재현이란 무엇일까. 행위가 식별되기 위해서 행위자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행위만이 있다면 스페이스 오프는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열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재현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재현한다는 것을 행위로서 파악할 수 있다면 이것은 행위를 통해 만들어내는 구성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이러한 차원에서 페미니즘 비평에서 재현이 여성을 물신화한다며, 그것이 젠더 이데올로기에 충실하다는 이유로 그 뒤의 원본을 찾아내고 비평하려는 태도는 의식적으로 거부되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행위만이 있을 뿐이라면 이제 페미니즘 비평은 재현에 대한 고착적이고 고압적인 투여를 거두고, 스페이스 오프로서의 사건화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위와 같은 문제의식과 이론의 도입을 이어나가면서 더 얻고 싶은 기둥(pillar)가면의 자기 재현이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기(자기 자신에 대한 재현)가 어떻게 말하기라는 행위만이 있을 뿐임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그리로 건널 수 있는 도구가 가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앞에서 리비어의 가면의 경우 정신분석학에서 팔루스 없는 존재로서의 여성이 팔루스라는 성적 체제에 들어가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면 이와는 다르게 가면을 사용하고 싶다. ‘가면이라는 행위만이 있기 때문에 재현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여성을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일관성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행위성으로서의 가면의 재현일 뿐인 젠더를 통해서 자유롭게 만들고 싶은 존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