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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7회차 쪽글]_젠더 트러블_2장 금기,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 모태의 생산2018-11-16 14:4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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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 모태를 생산하는 '기원'에 대한 질문들에 대한 비판.  


 7회차_주디스 버틀러_젠더 트러블_2장 금기,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 모태의 생산


가부장제의 자기 물화 과정을 비판하기 위해 기원으로 돌아가는 방식은 그 의도는 어떻든간에, ‘그런 가부장제적 기획 자체가 또 다른 종류의 물화라는 것이 입증된다.(154) 버틀러는 2장의 서두에서 이전’(혹은 기원)(155)에 대한 상상은 (가부장제/억압)의 구성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게’(155)한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목표를 수행할 뿐 아니라’(155) ‘여성성을 물화하여 이상적인 여성상이라는 하나의 모델 혹은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내부에 배타적인 실천을 만들어낸다.’(155)고 비판한다.

반페미니즘적 주장은 역사적이고 우연한 현상을 물화하고 당연시한다. 그런데 이 물화에 대해 대항하는 것은 어떤 방식이 되어야 할까. ‘가부장제 이전의 문화 상황으로 되돌아간 것은 가부장제의 자기 물화(self-reification)를 폭로하려는 의도였지만, 그런 가부장제적 기획 자체가 또 다른 종류의 물화라는 것이 입증되었다.’(154)는 것을 참고 할 필요가 있다.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에서 주의할 것이 그것(가부장제)의 자기 물화(self-reification)를 폭로하면서 여성적 경험의 물화를 발전시키지 않’(154)아야 한다.

가부장제를 보편적인 제도로 상정하고 그 이전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방식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실패하고 만다. 결국 이러한 서사는 가부장제라는 억압적 제도를 여성의 보편적인 경험으로 획일화하고 그것이 왜 출현할 수 밖에 없었는지 필연적인 이유를 대고 있는 형국이 된다. 가부장제 이전을 상정하는 방식 뿐인가. 앞으로 살펴볼 금기에 대한 법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기원의 조작은 법의 구성에서 정점에 이르고, 그에 따라 정당화되는 어떤 필연적이고 일방적인 서사에 이어서 법 이전의 사태를 기술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기원에 관한 이야기서사에 내재된 일종의 전략적 전술, 복원될 수 없는 과거를 설명할 유일한 권위를 확보해서 법의 구성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155) ‘이전’(155)에 대한 상상이 역사 이전의 서사적 관점에서 그려질 수밖에 없다면, 이전이란 것에는 페미니즘적이든 반페미니즘적이든 언제나 현재와 미래의 관점에 대한 자기 정당화된 방식의 조작이 이미 개입되어 있다.’(155) 이 경우, ‘문화 이전의 국면에서의 진정한 여성성을 물화하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지지하는 것이 되며, 이때 페미니즘 이론에서 이전은 정치적으로 문제적인 것이 된다.’(155) ‘순수한 여성성에 기대는 것은’ ‘젠더에 대한 설명을 복잡한 문화적 구성물로 규명하려는 당대의 요구를 거부하는’ ‘감상적이고 편협한 이상이다’(155)

 

버틀러는 엥겔스의 이론이나 사회주의 페미니즘 같은 구조주의 인류학에 뿌리를 둔 페미니즘이 젠더 위계의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에 대해 억압을 보편화하려는 제스처를 비판적으로 바꾸려는 의미 있는 시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때의 비판의 도구가 문제가 되는 규범적 이상들을 수반하는 가상의 허구를 이용하고 있는지’(156)추적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섹스/젠더 구분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을 전유하였다. 레비-스트로스의 틀에서 ‘‘섹스는 자연이나 날 것’, ‘젠더는 문화나 익힌 것과 연관된다.’ 만약 레비-스트로스의 이론틀이 사실이라면’ ‘친족의 교환규칙을 밝혀냄으로써 섹스가 젠더로 변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이 경우 섹스가 문화적, 정치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섹스는 법 이전에 존재한다.’ 레비-스트로스의 틀은 친족 법칙’ ‘이전의 문화의 원재료를 제공하는 것이다.’(156) 이 경우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섹스라는 애가 원래 있었는데, ‘친족 법칙이라는 (정당한? 자연스러운? 혹은 당연한?) 법이 적용되어서 젠더가 만들어졌다는 식의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것으로 현재의 법-여성 교환 혹은 여성 억압-은 정당한 것이 된다.

버틀러의 비판은 앞서서도 지적했듯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문제다. ‘(가부장제/억압)의 구성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게’(155)한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목표를 수행할 뿐 아니라’(155) ‘여성성을 물화하여 이상적인 여성상이라는 하나의 모델 혹은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내부에 배타적인 실천을 만들어낸다.’(155)

버틀러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담론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담론이 아닌 이상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1장에서도 언급되었던 내용을 다시 상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섹스/젠더 이분법은 젠더 이전에 모방의 대상으로서의 주어진섹스를 가정하지만, 이는 마치 담론 바깥이 존재한다는 말 만큼이나 허구적인 것으로, ‘섹스=전담론적(prediscursive)인 것이란 인식은 젠더라는 문화적 구성장치의 효과’(98). 실재하는 사람, , 몸을 가정하는 한 우리는 젠더의 관계성의 구조를 보지 못한다. 버틀러의 말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젠더의 표현물 뒤에는 어떠한 젠더 정체성도 없다. 정체성은 결과라고 알려진 바로 그 표현물때문에 수행적으로 구성된다.’(131)

 

다시 한 번 꾹꾹 눌러쓰자면... ‘섹스 개념은 담론적인 구성물이다.’ ‘이는 자연/문화 구분의 당연한 토대이자 그 구분이 지탱하는 지배 전략으로 작동한다.’ 이분법 관계는 위계관계를 발전시킨다.’ ‘그 관계 안에서 문화는’ ‘자유럽게 자연의 의미를 부과’’(157)한다. ‘문화지배 모델의 의미구조와 기표의 이상성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자연을 자신의 무한한 용도에 맞게 전유되는 타자로 해석한다.‘(157)

인류학자 라밀린 스트래던과 캐럴 매코맥은 여성/남성을 자연/문화에 비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지루한 이분법의 반복으로 보인다. 버틀러는 성 정치학이 만드는 토대와 동시에 행해지는 토대에 대한 은폐 행위를 비판한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성 정치학은 자연에 대해 담론을 생산한다. 이 담론에서 몸과 자연여성으로 의미남성으로 위치지어진다. 이때의 성 정치학은 이중의 작업을 한다. 성 정치학은 담론(‘자연스러운 성이라는 담론)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문화인데, 이것은 자신의 확고한 기반으로 자연스러운 성을 생산한 덕에 자기 자신의 기반은 은폐된다.(157~158)

 

1절 구조주의의 비판적 교환

 

구조주의 담론은 레비-스트로스가 친족의 모든 체계를 특징 짓는 교환의 보편 구조로 내세운 근친상간 금기라는 법을 단일한 것으로 지칭’(159)한다. 이것은 남근로고스 중심 경제의 원리로 이리가레의 주장대로, ‘여성, 여성성, 또는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는 명명 불가능하며 양성 간의 비상호성을 전제로’(165) 한다. 만일 상징계에서 배제된 성의 영역이 존재하고, 그 배제된 영역이 범위 안의 모든 것을 전체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상징계의 패권주의를 폭로할 수 있다면, 이 배제된 성의 영역을 상징 경계의 배부나 바깥에 위치시키는 일이 분명 가능할 것이다. (이리가레의 틀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 ..) 또 그러한 위치 변경의 관점에서 배제된 영역이 개입될 전략을 짜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버틀러는 이리가레의 작업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도, 그보다 근본적인 비판이 필요하다고 본다. 1절에서의 레비-스트로스, 2장에서의 라캉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구조주의 관점에서 성차의 생산을 설명하고 있는 구조주의적 법과 서사에 대한 재해석이 바로 그 중 하나다. 버틀러는그 법에 전제된 고정성과 보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계보학적 비판을 통해 법의 우연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생성력을 폭로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법의 필연성에 대해 설명하는 레비-스트로스의 논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버틀러가 인용하는 레비-스트로스의 말은 다음과 같다.“상징적 사고의 출현으로 인해 이는 여성들에게 언어처럼 교환 대상이 될 것을 요구했음이 틀림없다”‘이러한 주장은 레비-스트로스가 투명한 관찰자의 회고적 태도에서 오는 미리 전제된 보편적 문화구조에서 어떤 필연성을 끌어왔음을 시사한다.’

레비-스트로스가 인정한 것처럼 근친상간은 사회적 사실이 아니다. 그러니까 근친상간이 먼저 있고 금기가 생긴 것이 아니다. 근친상간 금기라는 법이 금기를 사후적으로 생산한 것이다. 금기()은 자신이 보편이며 그 것 앞에 금기(상상적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금기(상상적 행위)를 생산한 것은 바로 이 금기 아닌가.

 

2라캉, 리비에르, 그리고 가면의 전략들

 

결핍과 상실이 가득한 라캉의 팔루스 모델에서, 여성은 팔루스를 체현하고 확증해줄 결핍처럼 보이, 이는 가면’, 여성적 위치 그 자체의 본질적 요소인 우울증 효과를 통해서다. 라캉은 여성의 가면을 자신의 여성성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거부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를 동성애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이러한 라캉의 입장은 이성애적이고 남성적인 관찰에 따른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라캉의 모델 팔루스 (being)’과 팔루스 가짐(having)’존재의 외관이나 효과라는 것이 언제나 의미화의 구조를 통해 생산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170) 버틀러가 지적하는 데로 라캉에게 있어 상징계는 문화적으로 보편적인 의미화의 구조로 이해’(171)된다. 라캉의 분명 그의 성차 공식에서 이 의미화의 틀을 문제시’(171)하는 듯하지만, 그는 여전이 이 의미화 구조를 자연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여전히 기표로서의 주체와 기의로서의 대상을 전제로 하는 틀, 즉 주체에 대한 구조주의적 위치 변경에 선행하는 철학 내부의 전통적인 인식론적 이분법’(171)에 놓여있는 것이다.

라캉의 틀에서도 역시 그 스스로가 기원을 구성하는 담론이면서 그 스스로가 담론(혹은 법)임을 감추는 작용이 반복된다. 남성적 주체는 의미들의 기원이며, 의미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남성 자신에 기초한 것처럼 보이는 자율성은 자신의 토대가 되는 동시에 자신의 영원한 비토대의 가능성이기도 한 억압을 감추려 한다.’(171) 여성에게 남성적 주체/기표의 자율적 힘을 반영해달라는 요구가 그런 자율성을 구성하는 핵심(172)이 된다. 이때 여성에 대한 의존성은 남성적 주체에 의해 부정되는 동시에 추구되는 것인데, ‘부정이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때 확증을 주는 여성은 위치가 변경된 모성의 몸이고, 개체화 이전의 주이상스를 회복하겠다는 헛되지만 끈질긴 약속’(172)이 된다. ‘여성은 남성 주체가 스스로 기반하는 위상의 실제를 반영하거나 재현할 힘과, 그 힘이 철회될 경우 남성 주체라는 위치의 근본적인 환영을 깨버릴 힘을 보유한다는 의미에서 팔루스 것으로 언급된다. 분명한 남성 주체라는 위치의 반영물이자 보증물인 팔루스 이기위해서, 남성 주체라는 위치의 반영물이자 보증물인 팔루스이기위해서, 여성은 다름 아닌 남성이 아닌 것이어야하며 (‘여성은 그런 척한다는 의미에서), 여성의 결핍 속에서 남성의 본질적인 기능을 확립해주어야 한다. 따라서 팔루스 이다라는 것은 언제나 어떤 남성 주체를 위한 존재를 의미하며, 그 남성 주체는 ‘~를 위한 존재(being for)’를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증폭시키려 하는 것이다. 강하게 말해, 라캉은 남성이 여성의 의미를 만들거나, 여성이 남성의 의미를 만든다는 개념에 반대한다. 팔루스 이다와 팔루스를 가진다의 구분과 교환은 상징계, 즉 아버지 법에 의해 확립된다. 이 실패한 상호관계의 모델이 갖는 코미디 차원의 요소는 물론 남녀의 위치가 의미하는 기의이며, 남녀 중 어떤 위치에서도 형식적 양식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상징계에 속하는 기표이다.(172~173)

그런데 팔루스 인 여성과 그러한 여성을 대상으로서 욕망하는 남성이라는 틀에서 어느쪽도 불만족스러울 수 없다. 여성이 아버지의 법안에서 의미화된 교환대상일 때 이것은 그 법이 아니라, (아버지의) 법을 완전히 반영할 수 없는, 팔루스 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성은 이 불완전한 팔루스 에 의존하고 있어서 팔루스를 가진다는 위치를 차지하려는 모든 노력에는, 필연적 불가능성이나 전제된 불가능성이 들어 있다.’(174) 다시 말해 가지다이다라는 둘의 위치가 결국 라캉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로’(174)귀결된다.

그런데 여성은 어떻게 해서 팔루스처럼, 즉 팔루스를 체현하고 확증해줄 결핍처럼 보이는가’? 라캉은 여성이 팔루스인 것 처럼 보이는’’ ‘가면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라캉이 여성의 가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을 보자. “여성이 자신의 여성성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거부하고, 특히 가면을 통해 여성성의 모든 속성을 거부하는 이유는 바로 팔루스가 되기 위해서, 타자의 욕망의 기표가 되기 위해서이다. 여성이 사랑하거나 욕망하리라 예상되는 것은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을 향해 있다. 그러나 여성은 자신이 사랑의 요구를 전달하고 있는 사람의 몸에서 욕망의 기표를 발견한다. 물론 우리는 이 기관(페니스)에 페티시의 가치를 갖는 의미화 작용을 투여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괄호는 필자)(라캉, 84)

 

팔루스인 것 처럼 보이는’’것은 모순적 의미를 안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이기being’, 즉 팔루스에 대한 존재론적 특징이 가면이라면, 그것은 모든 존재를 보이기’, 즉 존재의 외양이라는 형식으로 환원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 결과 모든 젠더의 존재론은 외양의 작용으로 환원되는 것이다.(하지만) 다른 한편, 가면은 그에 선행하는 어떤 존재나 존재론적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가면으로 가려지고 폭로될 수 있는 여성의 욕망이나 요구, 다시 말해 정말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적 의미화 경제의 종국적 파열이나 위치 변경을 약속할 여성적 욕망이나 요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75) 다시 말해 한편으로 가면은 성적 존재론의 수행적 산물, 즉 가면 자체를 어떤 존재로 확신시켜 보이려는 것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 가면은 여성적 욕망의 부정으로 읽힐 수 있는데, 남근 경제의 규제를 받아 재현 불가능하던, 어떤 선험적인 존재론적 여성성을 전제로 하는 여성적 욕망의 부정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176)

버틀러는 라캉의 글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페니스로 추정되는 이 이름 없는 기관은 하나의 페티시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라캉의 가정대로 이 사실을 그토록 쉽게 망각’(178)해야만 하는 것일까. 또 여기서 말하는 여성성의 본질적 부분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가면을 통해 거부한다고 말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라캉의 여성성의 본질적 부분이라는 표현은 그가 섹슈얼리티를 단지 이성애적인 것만으로 간주’(180)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라캉은 가면에 대한 논의를 여성 동성애와 연관시켜 설명한다.’(179) “가면의 작용은 (...)사랑의 거부가 해결되는 방식인 동일시를 지배한다는 것이 라캉의 설명이다. 다시 말해 가면은 우울증적 합체(incorporation)전략의 일부이고, 사랑의 거부 결과 상실이 발생하는 곳에서 상실한 대상/대타자의 속성을 몸에 걸치는 것이다.(179) 라캉은 관찰에서 밝혀졌듯이 여성의 동성애 경향은 실망에서 오는 것이고, 그것이 사랑의 추구라는 측면을 강화시킨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라캉의 말에서 편의상 누가 간찰하고 무엇이 관찰되는가는 생략되어 있는데도, 라캉은 자신의 해석이 누구든 주의 깊게 본 사람에게는 명백히 나타난다고 간주한다. ‘관찰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은 여성 동성애자의 근원적인 실망이고, 여기서 이 실망은 가면을 통해 지배/해결된 거부를 되살아나게 한다. 또한 여성 동성애자가 어떤 강화된 이상화, 즉 욕망을 대가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속구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고 다소 관찰하게 된다.’(179) ... “이러한 주장은 사랑의 거부가 해결되는 그 동일시를 지배하기 위해 가면의 작용으로 되돌아가야 입증될 수 있다만일 여성 동성애가 관찰이 입증하듯어떤 실망의 결과로 이해된다면, 이 실망은 관찰될 수 있도록 드러나고, 또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라캉이 만약 여성 동성애는 관찰에서 나타나듯 실망한 이성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면, 관찰자가 보기에 이성애 역시 실망한 동성애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분명하지 않겠는가? 그것(이성애)관찰된여성 동성애의 가면인가? .. (180)버틀러는 관찰된이라는 표현을 비판한다. 그런데, 라캉은 이 관찰에서 무엇을 실망을 읽었는가? ‘라캉은 관찰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레즈비언의 탈성화(desexualization)된 위상, 욕망의 부재로 보이는 일종의 거부의 합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180) 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이러한 라캉의 결론은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섹슈얼리티 자체의 거부로 받아들이는, 이성애적이고 남성적인 관찰에 따른 필연적 결과.’(180).

리비에르는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어니스트 존스의 유형학에 경의를 표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이성애와 동성애 간의 경계를 흐리는, ‘중간 유형’(182)을 서술하낟. 이 중간 유형이 바로 가면을 쓴 여성성으로, 리비에르는 페렌치의 유형학에 아이디어를 얻어 남성의 위협에 대한 불안과 보복을 피하기 위해’ ‘여성성이라는 가면을 쓴여성을 말한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리비에르 역시 남성성을 소망하는여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경우 리비에르 역시 라캉처럼 본질로서의 여성성혹은 여성 섹슈얼리티를 가정하고 그것이 아닌 것은 섹슈얼리티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라캉에서처럼, 여기서도 레즈비언은 무성적 위치, 사실상 섹슈얼리티를 거부하는 위치를 의미한다.’(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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