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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6주차 쪽글] 젠더 트러블 1장 2018-11-09 1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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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표현물 뒤에는 어떠한 젠더 정체성도 없다'- 젠더 트러블 1장 


여성들의 삶이 잘못 재현되거나 전혀 재현되지 못했던’(85) 그간의 사정을 생각할 때 페미니즘 주체로서의 여성들을 재현하는 일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이는 주체라는 개념을 지지하는 근본주의적 허구’(88)라는 점에서, ‘여성이라는 범주를 일관되고 안정된 주체로 확립하는사이 젠더 관계를 규제하고 물화’(93)하는 문제를 초래한다. 젠더가 다른 역사적 맥락 속에서 늘 가변적이고 모순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담론적으로 성립된 정체성의 인종적, 계급적, 민족적, 성적, 지역적 양상들과 부단히 마주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젠더를 정치적 문화적 접점에서 분리하여 여성들을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가부장제라는 개념으로 젠더 억압을 보편화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 ‘남성성/여성성이라는 이원구조는 각각의 고유성이 인식될 수 있는 배타적 구조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온갖 다른 방식으로 여성적인 것의 특성specificity’ ‘계급, 인종, 민족성 및 다른 권력 관계의 축들과 분석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분리’(91)된 것으로 만드는 우를 범한다. ‘페미니즘의 정치적 과제는 (마치 그럴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재현 정치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관행을 꼬집는 계보학’(92)이 되어야 한다.

섹스/젠더 이분법은 젠더 이전에 모방의 대상으로서의 주어진섹스를 가정하지만, 이는 마치 담론 바깥이 존재한다는 말 만큼이나 허구적인 것으로, ‘섹스=전담론적(prediscursive)인 것이란 인식은 젠더라는 문화적 구성장치의 효과’(98).

페미니즘 이론의 출발점인 젠더는 섹스의 문화적 해석’(98)이라는 명제는 생물학은 운명이다라는 공식을 깨기 위해 등장했을지 모르나, 생물학의 자리에 문화를 놓은 것 외에는, ‘젠더사람의 속성으로 보고 관계성의 구조를 사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보부아르의 공식에는 서구형이상학이 언제나 행위주체 즉 코기토를 암시(99)하듯이 섹스라는 실체가 존재한다. 섹스/젠더라는 이분법은 몸/정신, 여성은 몸(보편 외부)/남성은 정신(보편적 인간주체)등의 이분법을 생산하면서 전개된다.(100) 뤼스 이리가레 역시 섹스/젠더라는 이분법을 고수하나 세부적인 부분에서 보부아르와 차이가 있다. 보부아르에게 여성이 보편 주체로서의 남성에 대해 타자other로 지목되었다면, 이리가레는 주체/타자라는 틀의 이분법, 남근로고스에 기반한 의미화 경제에 대해 비판하면서 여성의 성은 남성적인 주체를 내재성이나 부정성으로 규정한 결핍이나 타자가아닌 재현의 필요조건을 벗어난다’(104)고 주장한다.

보부아르나 이리가레의 주장이 여전히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전체화된 주장이라고 비판하는 것에서 멈추어서는 안 되며, 페미니즘 자체의 전체화 동향에 대한 자기비판으로 여성 정체성의 보편성을 전제하고 연합하는 정치학을 넘어 우연적 토대 위의 젠더 정체성을 설정해야 한다. 따라서 이분법적인 것, 통일성을 지닌 것의 너머를 이론화하는 일은 열린 연합, 다시 말해 완결이라는 규범적 목적에 복종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집중과 분산을 허용하는 열린 집단(114)에 대한 것이다.

정체성’, ‘섹스등을 젠더 정체성에 대한 논의 이전에 놓는 것은, 실체를 가정하고 시작하는 실체의 형이상학의 전통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젠더는 수행적이며 물론 그 행위 이전에 어떤 주체나 정체성도 없으며’ ‘정체성은 결과라고 알려진 그 표현물 때문에 수행적으로 구성된다.’(131) 버틀러는 푸코나 제3의 젠더로서의 레즈비언 형상을 제시한 위티그 역시 행위 뒤에 행위자의 존재를 전제했다는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고 본다.

(젠더 존재론의 새로운 정치 계보학을 위해서 위티그와 이리가레이의 입장을 대조하고 권력과 섹슈얼리티에 대해 전개. 이 대목은 아직 요약이 잘 안되었음.)위티그는 본질의 형이상학을 반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인간 주체, 개인을 행위 작용의 형이상학적 장소로 상정하고 있다. 위티그의 휴머니즘은 행위 뒤에 행위자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132) 그럼에도 그녀의 이론은 원인결과로 혼동하곤 했던 설명방식들을 반박하면서 젠더의 수행적 구성은 문화의 물질적 실천 속에서 가능하다고 설명한다.(132) 이리가레이는 젠더 표식을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한 부분으로 이해한다. 남성적 의미화 경제는 자아 연구의 사유기제를 통해 작동되며, 서양철학 전통에서 사실상 존재론의 영역을 결정지어왔다. 젠더에 대한 다른 관점은 언어에 대한 두 입장 차이와도 연결된다. 이리가레이가 언어를 젠더 표식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134) 라고 생각한 반면, 위티그는 여성적 글쓰기는 없다고 단언한다. 유물론자로서의 위티그에게 언어‘‘물질성의 또다른 질서로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제도. 그리고 이 변화에 남녀 동성애라는 쾌락 경제가 대안이 될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 대한 위티그의 대립관계다형적 도착성인간 섹슈얼리티의 목적인으로 안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페미니즘 이론에서 섹슈얼리티는 기존의 권력관계 안에서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143)이었다. 이 가정이 맞다면 권력 이전’ ‘외부’ ‘너머에 있는 규범적인 섹슈얼리티를 가정하는 일은 문화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실현 불가능한 꿈일 것이다.(143) 이는 단순히 섹슈얼리티를 전복하는 것이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섹슈얼리티 혹은 젠더 배치의 가능성을 다시 할 수 있는 반복의 형식에 대한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믿었던 젠더 통일성은 강제적 이성애의 실천효과’(145)였다. 보부아르의 공식은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의 냄새가 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으나, ‘여성 자체가 과정중에 있는 용어라는 것’(147)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버틀러의 성/젠더 체계에 대한 비판은 자연적 성을 젠더라는 행위 이전에 있다고 가정하는 형태에 대한 지적이다. 이러한 구조는 서구형이상학의 구조 본질과 가상 혹은 정신과 육체라는 이원론적인 구조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젠더라는 행위 이전에 성이라는 행위주체가 있다는 가정이다. 버틀러의 행위주체와 행위작용에 대한 논의 틀은 로고스 중심의 서구형이상학 비판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하지만 더욱 새로운 것은 서구형이상학을 비판했다고 하는 숱한 남성 철학자들이 놓친 부분. 그러니까 (젠더 외에)다른 모든 것은 본질주의적 접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성/젠더 체계의 본질주의적 함의에 대해서는 놓친 대목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통찰이다. 버틀러의 논의를 따라 생각해보면 젠더는 결국 가상에 대한 가상으로 초월론적인 가상이다. 따라서 이 가상에 대해서는 어떤 도그마적인 정의를 해서는 안 된다. 같은 이유로 이 가상으로만 출현하는 젠더를 이성/감성(가상)이라는 이분법 논리로 지우려 해서도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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