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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6주차 서평] 신자유주의 통치성으로 인해 사라진 호모 폴리티쿠스를 찾는 법2019-05-03 19: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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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통치성으로 인해 사라진 호모 폴리티쿠스를 찾는 법



웬디 브라운의 <<민주주의 살해하기>>(2017)는 존재의 모든 측면을 경제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독특한 통치 이성 형식인 신자유주의가 개인과 정부를 새롭게 재정립하면서 정의의 원칙, 시민의 관습, 법 관행, 교육 등 민주주의의 정치적 성격을 해체해버리는 양상을 분석한다. 브라운의 주장의 핵심은 신자유주의가 단지 경제 체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 합리성으로서 개인의 존재 자체 및 국가의 존립 근거를 규정하는 원리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국가와 개인이 공히 오직 경제적 틀로만 사태를 인식하고 경제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브라운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활용하고, 이로 인해 사라지는 민주주의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루소의 민주주의론을 참고한다. 푸코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1978~79)에서 자유주의 통치성이 위기에 봉착며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사회 기구 내에서 기업의 형식을 일반화하여 사회 분야 전반을 경제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브라운에 따르면 푸코는 주권을 대외적으로 추구하며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사회적 세력으로서의 데모스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적 삶이나 시민과 교차하고 영향을 미치는 지점으로 확장시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브라운은 신자유주의 통치성으로 인해 호모 폴리티쿠스가 사라지는 국면을 문제의 핵심으로 주목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대중이 주권을 가지고 자기-지배에 집합적으로 참여하는 자유로운 삶을 의미하며, 그 속에서 호모 폴리티쿠스는 국민주권의 실현에 의해, 국민주권의 실현을 위해 움직이며 스스로를 통치하는 주권적 존재로, 근대의 대부분 동안 이재를 도모하는 경제 주체인 호모 에코노미쿠스와 나란히 존재했으나 결국 21세기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호모 폴리티쿠스를 거의 몰아내기에 이른다.


이렇게 정치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경제화되는 양상을 이 책에서는 행정 양식, 법적 논리, 교육의 가치의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행정 양식은 거버넌스로, 모범 사례를 벤치마크하여 매뉴얼을 마련하고 이를 민-관-기업의 협치를 통해 이행해가는 이 행정 양식은 문제해결과 효율성 제고만을 목표로 할 뿐 목표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의문은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과제의 수행에서 정치적 성격을 완전히 탈각시켜버린다는 문제가 있다. 법적 논리의 차원에서는 미국 대법원이 자유라는 미명하에 기업이 정치적 주체로서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주면서 법이 정치에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기여를 한 사람에게 그만큼 혜택을 보장해주는 시장 논리를 마련해주는 근거로 작동하는 양상을 비판한다. 교육 분야에서는 교육의 목표가 오직 인적 자본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것으로 한정되면서, 다양한 사회적 사건과 자신의 삶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고 평가할 역량을 갖추어 공공의 관심사에 대해 탐구할 수 있도록 시민들에게 리버럴아츠를 교육할 수 있는 보편적 교육제도가 거의 무너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브라운의 이러한 논의는 통치 합리성으로서 신자유주의가 개인과 국가까지를 전부 경제적 존재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를 경제영역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업과 개인, 기업과 국가의 관계까지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음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는 호모 폴리티쿠스의 민주주의적 형상이 신자유주의 통치 합리성에 대항할 무기이자, 인간의 다른 존재 가능성을 보여주는 비전의 원천이라고 말하며(3장 1절), 그 호모 폴리티쿠스의 가능성을 ‘월스트리트 점거 농성’에서 찾은 듯하다. 그러나 이는 브라운이 본인이 분석 대상으로 설정한 ‘신자유주의 하에서 해체되고 있는 시민’을 모종의 단일한 집단으로 상정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해체되는 시민은 매우 다양한 모순과 착취를 경험하는 다양한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심지어 시민이라는 경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조차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며, 이로 인해 소외받는 자들은 꾸준히 정치적 주체로서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이 확보한 정치적 영역의 성격과 그것과 타격을 주고받고 있는 신자유주의와의 역동을 분석하지 않았기에 그가 찾고자 하는 ‘호모 폴리티쿠스’를 발견하기가 난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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