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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7주차 쪽글] 억압의 상상적 기원과 법 : 구조주의 인류학, 정신분석학적 ‘법’이론 비판2018-11-16 16: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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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이론학교] 20181116. 쪽글. 전주희. 

범위 : 2. 금지,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적 매트릭스의 생산. 1) 구조주의의 비판적 교환, 2) 라캉, 리비에르, 그리고 가면의 전략들. 



제목 : 억압의 상상적 기원과 법 : 구조주의 인류학, 정신분석학적 ‘법’이론 비판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트러블> 중 2장. ‘금지,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적 매트릭스의 생산’의 전반부를 관통하는 것은 ‘법’이다. 그 중에서도 구조주의적 흐름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인류학과 정신분석학에서 상정하는 법과 억압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룬다. 법을 보편성, 단일성, 고정성으로 사유하려는 경향은 각각 레비스트로스와 라캉 안에 의도하거나 혹은 의도하지 않은 채 내재하는 문제다. 이것은 법과 억압의 문제를 이성애 매트릭스 안에서 사유할 때 남성과 여성의 비대칭적인 주체의 자리를 할당하며 고정한다. 즉 남성은 법의 자리이자 기원의 자리로, 여성은 법의 억압적 효과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한에서 여성의 또 다른 주체화의 전략, 즉 저항의 가능성은 법의 바깥에서 혹은 법의 이전의 자리(억압 이전의 자리이자 저항으로서의 또 다른 기원)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이것은 '가부장제'를 이론화하는 페미니즘의 전략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 즉 억압이라는 새로운 기원의 사고이다.


여성의 해방을 위해 우리는 지배적인 남성성과는 다른 기원적 사유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가?  

구조주의의 이러한 경향은 뿌리깊게 남아있는 본질의 형이상학의 잔재를 넘어 본질과 기원에 대한 또 다른 판본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페미니즘을 당대의 문화적 투쟁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것(159), 탈정치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이때 버틀러는 우리에게 집요하게 사유의 전환을 촉구한다. ‘법을 사유하지 않는 한 억압에 대한 정치적 기획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듯이 보인다. 따라서 정치란 ‘법에 맞선~ ’(이는 법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있다는 것을 저항의 형식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은 아닌가?)이 아니라, '법이 전제한 근본적 토대를 심문하는 것, 이를 위해 우리의 실천을 법에 기입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를 위해 1장에서는 인류학을 2장에서는 정신분석학을 다루면서 이 안에서 위치지어진 “법”, 그리고 법과 억압의 설정, 그러한 한에서 이성애 매트릭스, 그리고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위치를 분석한다. 이러한 위치로부터 출발한 주체화는 어떻게 나타나며,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은 어떻게 이야기 될 수 있는가? 

이때 뉘앙스가 중요할 것인데, 버틀러는 적극적인 대안적 모델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위치’-이것은 법 바깥의 존재로 여성을 사고하려는 것과 관련된다.-에서 출발하는 것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우선 레비 스트로스의 기획을 보자. 레비스트로스에게 구조는 보편적이며, 법은 단일하다(159). 부계 계승과 친족 관계라는 지배적 질서를 재생산하기 위해 여성은 하나의 관계어(160)로서 교환된다. 레비 스트로스의 상징적 특성은 인간의 보편적 특성인데, 이때 남성은 정체성을 획득하며, 여성은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관계어로서 정체성 부재이자, 남성적 정체성의 반영의 사태를 할당한다.(160)

이리가레가 탁월하게 지적했듯이 이러한 여성교환에 의한 사회의 확립이란, (중립적 사회란 없다), 남성간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한에서, 여성교환이라는 매개를 통해 확립된 남성들의 유대를 지배적인 것으로 만든 사회이다. 그런한에서 동성애적 섹슈얼리티는 레비 스트로스의 상징계 바깥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리가레의 시도-법 바깥에 대한 사유-는 성공했는가?)

하지만 레비-스트로스에게 상징계는 회고적이다. 또한 그래서 명령적(165)이다. 그것은 동성애적 금기가 아니라 근친상간이라는 금기가 문화적 보편진리로 전제되는 것으로 종결된다. 즉 레비-스트로스에게 법은 상징계의 차원에서 기원적으로 설정된다. 이때 이성애는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통해 기원적인 위치를 할당받는다. 그리하여 레비스트로는 이성애 매트릭스를 해체하지도, 분석하지도, 그 메커니즘을 설명해내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성애 매트릭스 안에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라캉의 경우 상징계가 팔루스를 중심으로 하여 변별적으로 의미화된다. 팔루스 ‘임(being)’과 팔루스 ‘가짐(having)’은 성적 위치와 성적 위치 없음을 각각 표시하며, 이는 남성적 욕망과 남성적 욕망의 타자로 분할된다. 라캉은 이러한 분할이 상징계, 즉 아버지 법에 의해 확립된다고 말하는데, “실패한 상호관계의 모델”(172)인 한에서 분할되며 상호 관계 맺는다고 말한다. 즉 ‘가지다’와 ‘이다’는 실패하는 한에서, 반복적인 실행을 강제한다. 

“라캉의 관점에서 볼 때 분리는 언제나 법의 결과이지, 법이 작동하는 전제조건은 아니다.”(190) 라캉에게 이성애 혹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분리는 확실히 법의 결과이다. 하지만 그것은 양성애를 가정하며, 이것은 섹슈얼리티의 이분법적 구별이라는 전제를 뒷문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버틀러는 이 같은 라캉의 꼼수(?)를 비판하면서 “문화란 그 문화가 억압하려는 양성애보다 결코 뒤늦게 오지 않는다.”(190)고 꼬집는다. 

따라서 라캉은 상징계와 실재계의 통약 불가능성(192)를 통해 법을 금지하는 것이자 생산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이것은 ‘실재계’라는 저항의 형식을 미리 결정하는 한에서, 즉 여전히 섹슈얼리티의 틀을 정형화하는 작용을 한에서 열어놓았다.(192). 


레비스트로스와 달리 라캉에게 법은 억압적일 뿐만 아니라 생산적이다. 때문에 법은 충분히 유동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재계라는 차원의 우선성을 놓으면서 어떤 낭만화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상실한 주이상스의 충만감에 대한 넘치는 향수’이자 ‘실패에 대한 종교적인 이상화’(193)이다. 또한 “법 앞에서의”(194) 필연적인 실패와 충족될 수 없는 사법적 명령 간의 변증법은 상징계를 인간주체에 절대적으로 작동하는 신의 자리로 만들어 버렸다. 

버틀러는 이러한 라캉의 ‘종교적 비극의 구조’가 욕망에 대한 대안적인 상상계를 형성하려는 모든 문화정치학의 전략을 무력화시킨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라캉의 철학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버틀러가 이토록 라캉을 비판하는 근거는 상징계라는 법의 절대성이며, 실재계라는 법 바깥의 저항성이다. 이 둘은 연결되어 있는데 법이 그토록 절대적이며 인간의 접근이 불가능한것이라면, 저항 역시 법 바깥에서 사유될 수 밖에 없다. 

그런 한에서 이러한 비극적 구조는 법을 중심으로 정치를 사유하려는 전략을 탈정치화한다. 우리는 정치를 사유하는 한에서 법을 사유할 수 없으며, 법을 사유하는 한에서 정치를 사유할 수 없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인다. 

그렇다면 버틀러의 전략은 무엇인가? 버틀러가 염두에 두는 권력의 생산성은 법과 상상계의 차원을 어떻게 재설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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