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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버틀러 이후, 정치의 가능성2018-10-12 16: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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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 이후, 정치의 가능성

Response paper 2 (규식)

 

Contingent Foundations: Feminism and the Question of “Postmodernism”」에서 버틀러는 배제, 전제와 비체/외부 형성을 통해 이뤄져 온 주체, 토대 개념을 비판한다. 그는 구성된 주체가 하나의 고정된 기반이나 결과물 대신 재의미화의 끊임없는 가능성으로 이해돼야 함을 주장하며, 고정된 지시체로부터 주체를 해방시켜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행위주체성 개념 역시 재확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주체 개념의 폐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신 주체, 토대는 정치적 논쟁에 언제나 열려 있는, 열려 있어야만 하는 장으로 이해된다.

버틀러의 이러한 의도는 글 안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의 시도, 주체의 죽음에 대한 재정의, 나아가 기존의 주체 이해를 넘어선 이후의 주체에 대한 인식 방향성 제시 등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전복적 의도, 토대주의의 위협을 안티-페미니즘의 그것보다 심각하게 여기는 일관성, 인식론적/존재론적 토대의 제거가 정치적 허무주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신중함 등은 저자의 글이 갖는 의미이자 매력이다.

 

버틀러의 이러한 전복적 통찰을 접하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다. 그러나 버틀러의 서구적 주체 이해 비판, ‘의심받지 않는토대에 대한 기각은 정말 성공적인가?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주체 비판 작업에는 항상 어떤 덫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정체성의 폭력에서 벗어나(개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들의 어떤 탈정치성에 관한 것이다.

영원불변하다고 여겨지는 것(혹은, 그렇게 여겨지지조차 못하던 것)에 대한 지속적 undermining은 비판 철학과 윤리의 자원으로서 분명 유용하다. undermining은 그것이 전제하는 권력관계, 배제의 폭력성과 비체의 생산/재생산의 메커니즘을 폭로할 창구를 확보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치적, 제도적인 차원으로 (어떻게) 승화될 수 있는지, 혹시 버틀러의 말처럼 주체를 정치적 논쟁에 열려 있는 장으로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주체, 토대 개념을 논쟁의 장 한가운데 위치시킴으로써 버틀러적 주체 작업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것이 되지만, 그 후의 의제화/제도화 가능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정치를 전제한다면) 저항적 정치는 (어떤 민주주의 형태에서든 간에) ‘결집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결집을 가능케 하는 것은, 상정되는 (공동체적) 보편성이다. 물론 이 보편성은 보편적 보편성일 수 없고, 특수한 보편성이다. 특정 사안에서 버틀러적 주체 비판 작업이 이뤄진 이후에/동시에, 배제 등의 전략이 없는 정치적 힘(매우 모호한 말이겠으나, 정치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글이 1992년 저서(Feminists theorize the political)에 실린 글이지만 이 글의 이전 버전이 1990(『젠더 트러블』이 출판된 해)에 쓰였음을 생각했을 때, 이 글을 쓸 때에는 버틀러의 현실 정치로의 전회가 본격화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주체 전복 이후에 제도-의제 정치로의 복귀가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은 버틀러의 학문적 여정과는 별개로 보다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문의 전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일종의 결국 정치(제도)라는 전제, 이는 제도나 의제 의결 기구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정치, 그 바깥의 가능성에 대한 삭제 시도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전제에 대한 반박은 그러한 정치 바깥에 위치하려고 하는 프레데릭 제임슨적 의미에서의 거대 서사로 대체로 환원되는 듯한데, 이 거대 서사 역시 하나의 토대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면 이 반박은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거대 서사 이외의 결국 정치다라는 말에 대한 반박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이 거대 서사와 정치의 이분법을 넘을 중간지대는 (어떻게) 구해질 수 있는가? 저항, 해체 담론이 정치를 거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전유될 수 있는가?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 중 제도 정치의 차원으로 진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있기는 한가? 그렇지 않다면, 기존의 주체가 해체되는 만큼이나 정치는 해체될 수 있는가? 포스트모던적 담론을 통해 얼마나 새로운 정치가 가능한가? 배제와 보편성에 기반하지 않은 정치적 힘, 결집이 가능한가? 오늘날의 반인간주의, 반주체철학에 이르러 등장한 주체에 대한 보다 전적인 해체는, 어떻게 정치로 승화될 수 있는가? 정치이지 않다면, 어떤 차원이 가능한가? 기존 철학-정치-담론에 대한 비판 자원 이상으로 버틀러적 포스트모더니즘 (Contingent Foundations에서 드러난)이 어떤 실천적 힘을 우리에게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결국 제도’, ‘정치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이다. 이 용어들 또한 논쟁적이며, 변화에 열려 있고, 권력(관계)의 책략에 의해 은폐된 토대를 상정하고 있음을 알고 논쟁에 임해야만 버틀러적 주체 비판의 적극적 승화가 가능할 것이다. 예의 질문들은 그 자체로 political한 버틀러적, 포스트모던적 주체 비판과 제도, 현실 정치 사이의 이분법, 메워질 수 없는 간극, 연결불가능성을 전제한다. 이것이 어떤 방향으로 타파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개체성을 담보하는 보편성의 정치가 실현된다면 이는 분명히 위의 논쟁을 거친 후의 일일 것이다.

 

버틀러는 주체를 막연히 거부/부인하는 대신 그것이 논쟁에 열려 있고 그래야만 함을 아는 것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그가 배제 전략에 대한 비판의 대상으로서 이미 형성된 것들(정치적 공동체 등) 자체를 기각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열려 있음의 정체성에서 과연 유의미한 '새로운결집, 움직임이 나올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과는 별개로 버틀러는 정치에 대해 의식하고 있으며, (Feminists theorize the political』라는 책 제목만 봐도 그렇다) 따라서 단순히 도덕의 수준에 자신의 주체 해체 시도를 머무르게 하려 했던 것 역시 아님이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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