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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3회차 쪽글] [젠더허물기] 1장 나 자신을 잃고2019-01-04 15: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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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차_주디스 버틀러_젠더 허물기_

 

1장 나 자신을 잃고

 

몸의 근원적 취약성primary vulnerability

 

무엇이 살기 좋은 세계를 만드는가라는 질문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34) 누군가는 자못 철학자나 하는 진지한 질문 같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이 질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누구나 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버틀러는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삶이 어떤 것이고, 또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특정한 관점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해 우리가 명백히 인간적인 것만이 가치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가정한다면이 경우엔 인간중심주의의 위험이 있다.’ 그러니까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때 주어로 회귀하는 방식. 그러니까 인간이 살기 좋은 세계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인간적인 것으로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삶의 문제인간의 문제둘 다를 질문해야 한다.

버틀러가 누가 인간으로 간주되는가’(35)에 대한 문제를 상기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이 있어 보인다. ‘무엇이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는 삶으로 만드는가’(35) 이 질문은 게이와 레즈비언의 죽음을 목격한 것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은 개별적인 것이고 우리를 각자 외로운 상황으로 되돌린다고 생각하지만’(36~37) ‘슬픔자아를 구성하는 사회성, 즉 복잡한 질서를 가진 정치 공동체를 사유할 기반을 드러낸다’(37) 이를테면 어떤 상실에 대해 내가 느끼는 바에 관해서 이야기하려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야기를 하려 하는 바로 자신이 그 이야기 한가운데에서 중단되는 이야기여야 할 수도 있다’(37)버틀러는 이 경우를 허물어내는undoing’것이라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온전한intact 상태로 있을 수’(37)있다고, ‘온전한상태라고 확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 온전하기를 바라거나 실제로 그럴 수는 있지만, 아무리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대면하면서 그 감촉이나 향기나 느낌, 아니면 그 감촉에 대한 예상이나 그 느낌에 대한 기억 때문에 허물어진다.’(37~38) 나의 정체성이라고 믿는 젠더섹슈얼리티역시 소유권이 박탈된 양식’(38)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둘 다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 양식, 혹은 실제로 다른 사람 덕분에 가능한 존재 양식으로 이해해야 한다.’(38) 버틀러가 젠더섹슈얼리티의 총체성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이 서술에서 관계성relationality’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 버틀러는 단호하게 관계성이라는 개념으론 부족하다고 덧붙인다. ‘관계성이라는 관점에서 자율성을 새롭게 기술하려고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38) 오히려 관계성우리가 기술하려는 관계 안의 균열을 봉합’(38)한다. 오히려 균열이야말로 정체성 자체를 구성하는 요인’(38)인데 말이다. 우리가 자율성이라는 환상을 걷어낼 때, 보다 분명히 말하자면, 섹슈얼리티나 젠더에 대한 소유권 박탈을 개념화하는 문제에 대해 다가갈 때, 우리는 엑스터시ecstasy’개념을 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엑스터시ecstasy’열정 때문에 자제력을 잃는 상태로 전환된다는 의미’(38)이기도 하지만, ‘분노나 슬픔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39) ‘나 자신을 잃은 상태의 나’(381번 주석), 다시 말해 제 자신을 잃고 사는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공동체를 구성하는지를 이해하는 일’(39)이 과제로 주어졌다. 우리는 슬픔이라는 감정의 연결을 통해 다른 삶에 우리를 연루’(39)시킬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권리를 주장할 때 편의상 우리 자신을 제한된 존재’(39)로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한 정의가 법적으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합당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실수일지도 모른다’(39) 이는 언어의 특성과도 관계가 있다. 언어는 법적 틀 속에서 적합성을 확립했을지는 몰라도, ‘열정이나 슬픔이나 분노를 온전히 나타내는 데는 실패’(39)한다. 따라서 누군가의 슬픔을 그 공동체를 명명하는 이름으로 한정할 수 없다. 나의 분노를 내가 속한 집단이나 계급으로서 주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 버틀러가 슬픔에 대해 애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슬픔을 통해 다른 타인과 연결되고, 내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는 것으로서,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잃고서 질문이 시작된다.

젠더나 섹슈얼리티에서 자율성을 말하기 어려웠듯이, ‘몸의 자율성역시 살아 있는 패러독스이다.’(40) ‘몸은 가멸성, 취약성, 그리고 매개성을 함축한다.’(41) 몸은 타인들의 응시에 노출시키는 한편, 접촉과 폭력에도 노출시킨다’(41) 우리는 몸에 대한 권리를 위해 투쟁하지만, 우리가 투쟁하는 몸 자체가 딱히 우리만의 것은 아니다.’(41)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자율성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율성을 얻기 위해 투쟁’(41)해야 한다. 다만 우리가 다방면에서 자율성을 얻기 위해 투쟁하면서도, 당연히 신체적으로 서로에게 의지하고 신체 면에서 서로에게 나약한 존재들의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과되는 요구에 대해 숙고’(42)해야 한다.

버틀러는 슬픔의 문제로 되돌아가, ‘슬픔이 그 안에 체현된 삶의 근본적 사회성을 이해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42)이라 서술한다. 이것은 우리가 몸의 존재인 까닭에 이미 우리 외부에 놓여 우리만의 것이 아닌 삶에 연루되는 방식을 이해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말할 수 있’(42)기 때문이다.(정말, 그런가?! 존재론적으로는 그러한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애도, 공포, 불안, 그리고 분노’(42)의 팽배함. 일련의 폭력들. 버틀러는 미국의 예를 들고 있지만, 한국 사회역시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미국식으로취약성을 최소화하거나 아예 배제하기 위해 통치권과 보안을 강화’(43)하는 해법의 문제다. 버틀러는 취약성을 배제하고 추방하려는 시도에 대해 비판한다. ‘안전해지려는 시도는 분명 방향을 잡고 나아갈 길을 찾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자원 하나를 뿌리째 뽑는 것이기도 하다.’(43) 반면, ‘우리의 삶이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사실()군사적인 정치적 해법을 주장할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신체적 취약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숙고하여 어떤 정치학이 구상될지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 치워버릴 수 없는 것, 함께 참여해야 할 것, 심지어 따라야 할 기준 같은 것이다.(43)

슬픔을 정치적 자원’(43)으로 만들 것. ‘수동성이나 무력감에 몸을 맡긴다는 뜻이 아니다.’(44) ‘다른 사람이 겪는 취약성을 생각해보게 해주는 것’(44)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간에 대한 더 일반적인 개념이 작동하고 있다.’(44) ‘우리는 처음부터 타인에게 주어져 있고 개체화 자체에도 앞서 있으며, 우리의 몸의 체현 때문에 타인에게 양도된다.’(44) 인간의 취약성’, 이것은 교정할 수 없다. ‘에 대한 이해 역시 마찬가지다. ‘의존성이 전제되어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몸은 여전히 어디론가 양도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삶의 억압을 이해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바로 이런 근원적 취약성primary vulnerability의 상황, 우리가 타인과의 접촉에 양도되는 상황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45) 물론, ‘인간의 신체적 취약성이 전 세계로 분포되는 방식근본적으로 다르다’(45) 여성 억압이 분포되는 방식이 다른 것처럼.

몸으로서의 우리는 언제나 우리 이상의 것, 우리 아닌 어떤 것이다.’(47) ‘몸의 생활, 성생활, (언제나 어느 정도는 타인에 대해) 젠더화된 존재가 되는 데 달린 특정한 사회성은 타인을 끌어들이는 윤리적 예인망의 영역을 형성하며, 일인칭 시점인 에고의 관점에 방향 상실을 가져온다.’(47)

 

성적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

 

이 글의 또 다른 핵심은 이성애적 규범하에서 인식불가능한 존재로 타자화 된 이들, 혹 애도되지 못하는 상실의 문제다. 그런데 누가 이것을 구분하는가. 타자로, 비현실적인 것으로, 애도할 수 없는 것으로. ‘애도할 수 없는 삶이란 개념은 어디서 오는가?’(46)

드랙, 부치, , 트랜스젠더, 트랜스섹슈얼 들은 당대의 실제 개념을 지배하는 규범이 어떻게 심문받을 수 있고, 새로운 실제 양식이 어떻게 제도화될 수 있는 지도 보여준다. 새로운 실제의 양식을 제도화하는 이런 실천은 부분적으로 몸의 체현의 장을 통해서 일어나는데, 여기서 몸은 정적이고 완성된 사실이 아니라 어떤 노화의 과정, 진행 중인 양식으로 이해된다.’(53) 이것들은 규범을 재구성’(53)하고, ‘우리가 구속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현실이 어째서 석판 위에 새겨진 글자가 아닌지를 알게 해준다.’(53)

레즈비언과 게이의 국제 인권운동의 중심과제 중 하나는 동성애가 인식되는 사회 세계의 규정적 특징의 하나로서 분명하고 공식적인 용어로 동성애의 현실성을 주장하는 것’(53)이다. 또 다른 하나는 게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것 자체가 무엇이 현실로 간주되고 무엇이 인간적인 삶으로 간주되는지의 문제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주장하는 것’(54)이다. ‘이러한 작업에 대해 반대하는 부당함은 어떤 것일까?’(54) ‘비현실로 부르는 것은 타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타자에 반해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런데, 사실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인식 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당신이 그저 항상 인간인양 말은 하고 있으나 실상은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당신의 언어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또 인정이 발생하는 규범이 당신 편이 아니라서 앞으로도 인정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54)이다.

여기서 인정은 없다’(54)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자기 보존 원칙) 개념, 헤겔의 인정욕망개념을 참조하여 생각하면 우리가 인정받을 수 없다면’ ‘우리는 가능한 존재가 아니다.’(56) 물론 이때의 인정 규범변한다.’ 푸코 식으로 이것을 다시 바꾸어 말하자면 인정 규범은 인간 개념을 생산하고 탈생산하는 작용을 한다.(56)

이제 성적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에 부여된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면서 또한 인간으로 인지되기 위해 투쟁’(58)하는 것이다. 후자는 인간이 표명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과정에 개입하는 방식’(58)이 된다.

인간됨의 의미 자체가 인정에 대한 욕망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욕망은 우리를 외부에, 다시 말해 우리가 완전히 다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진 선택권의 의미에 지평과 자원을 주는 사회 규범의 영역에 있게 한다.’(59) ‘이 말은 우리 존재의 탈아적 특성이 인간으로서 존속될 가능성에 필수적이라는 뜻이다.’(59) ‘우리가 성적 권리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그저 개인의 욕망에 관한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개인성이 의존하는 규범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60) 이는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우리의)존재 양식을 선언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율적이면서도 그 이전에 있는 인간의 취약성, 의존성에 대해 전제한 자율적 선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지를 물을 때, 우리는 삶이 삶이 되기 위해서 충족시켜야 할 특정한 규범적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삶에는 최소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최소한의 생물학적인 생존 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개입되어 있던 것으로 인간적 삶에 관한 삶의 최초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67) ‘우리가 젠더 폭력에 대해 질문하듯 인간 자신이 살기 좋은 조건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는 의미이다.’(68) 물론 그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관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어떤 총체적 미래에 책임을 지는 행위 속에 사는 것때문이기에, 쉽게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해 그 방향을 미리 완전히 알지 못한다’(68)는 것 속에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는 행위의 과정의 일부가 될 것이다. 주체가 먼저 제시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무엇이 옳은것이냐에 대해서는 논쟁이 필요할 것이고, 그래서 격정passion’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서 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자. ‘애도할 수 없는 삶이란 개념은 어디서 오는가?’(46) 어째서 어떤 죽음은 인정조차 되지 않는가. 이것은 인정 규범때문인데, 우리는 이 인정 규범을 관성적으로 굳어버린 것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에 구멍을 내기 위해서 우리가 근원적 취약성primary vulnerability’을 지닌 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을 잃고’ ‘몸의 취약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화하자면, 기왕 구성된 몸인데,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언어로도 표현이 불가능하기에, 슬픔은 꼭 필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언어는 법적 틀 속에서 적합성을 확립했을지는 몰라도, ‘열정이나 슬픔이나 분노를 온전히 나타내는 데는 실패’(39)한다. 대신 열정이나 슬픔이나 분노는 우리를 모두 우리 자신과 갈라놓고 타인과 연결하며, 우리를 다른 곳으로 내몰고, 우리를 무너뜨리며, 때로는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우리 것이 아닌 다른 삶에 우리를 연루시킨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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