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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0회차_주디스 버틀러_젠더 트러블_3장 전복적 몸짓들 ② '내면성'에서 '우연성'으로 2018-12-07 15:4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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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차_주디스 버틀러_젠더 트러블_3장 전복적 몸짓들

 

3. 모니크 위티그-몸의 해체와 허구적 성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보부아르의 명제는 젠더화되기 이전의 섹스의 심급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신화적이다. 정신분석이론이나 인류학이 젠더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젠더섹스-자연을 앞세우고 그것이 이미 젠더 장치라는 규범의 산물이라는 것을 감추었다. 이것으로 젠더라는 설명이 등장했지만, 달라진 것은 별반 다를 게 없어져버렸다. 여전히 이성애 메트릭스가 공고히 작동하지만, 그것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룰 수 없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젠더-문화앞에 섹스-자연이라는 항을 놓으면서 어떤 담론과도 상관없는 중립지대 혹은 자연적인 본능이 있는 것처럼 가정되었고, 이것으로 섹스/젠더 체계에 대해 계보학적 작업은 가로막히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위티그의 논의를 살펴보는데, 위티그는 보부아르의 섹스/젠더 이분법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 점에서는 버틀러와 맥락을 같이 하는 듯 보이나, 위티그가 을 또 다시 현전화한다는 점에서 버틀러는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위티그에게 섹스와 젠더는 아무 차이가 없다.’(295) ‘성의 범주는 불변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며, 재생산적 섹슈얼리티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한 자연 범주를 정치적으로 활용한 용례라는 주장이다.’(295) 또한 위티그는 레즈비언을 세 번째 젠더라고 주장한다.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295) 여성이 남성과의 이분법적 관계를 공고하게 만드는 용어로만 존재하는 반면 레즈비언은 여성과 남성 간의 이분법적 대립을 초월하는 자리에 있다고 본다. 위티그가 주장하는 정치적 과제는 성에 관한 담론 전체를 전복하는 것, 사실상 젠더허구적인 성(특히 불어로 표명된)어떤 본질적인 인간의 속성이자 대상의 속성으로 만드는 바로 그 문법을 전복하려는 것이다.(297)

위티그는 섹스같은 담론적 범주를, 사회적 장에 강제적으로 부과된 추상적 관념으로 생각하며, 이차적인 질서나 물화된 실제를 생산하는 추상적 관념으로 이해한다.(298) 따라서 섹스란 자신이 효과라는 것을 감추는, 어떤 억지스러운 과정의 리얼리티-효과이다. 나타난 것이라고는 섹스뿐이고 섹스는 어떤 원인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전체성으로 지각된다.(298) 위티그의 입장에서 남성들은 성별화되는 것이 아니다. 성별화되는 대상은 여자의 성이다. ‘여자의 성성의 그물에 갇혀 있’(297). 그리고 섹스란 자신이 효과라는 것을 감추는, 어떤 억지스러운 과정의 리얼리티-효과이다.’(298) 이 명제는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까. 이제까지 버틀러는 젠더란 섹스가 효과라는 것을 감추는 장치라고 했던 것 같은데...결과적으로 섹스가 효과라는 점에서는 유사해 보이지만 말이다.

앞서 1장에서 위티그를 보부아르나 이리가레이와 비교할 때 중요한 대목의 하나가 언어에 대한 입장이었다. 보부아르나 이리가레가 여성적 글쓰기를 말했다면, 위티그는 보부아르를 인용하면서 여성적 글쓰기란 없다.”고 주장한다. 위티그의 입장을 이리가레와 비교해보자면, 언어가 그 자체로 여성혐오적이거나 문제적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어떤 권력이 잡고 헤게모니화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니까 여성혐오적 언어는 언어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전유한 이들에게서 나온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여성적 글쓰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언어, 특수한 하나의 습관으로서의 이성애 담론이 보편을 주장하는 이들을 대변하는 언어의 문제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위티그는 언어를 물질성의 또 다른 질서’(134),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제도로 여긴다(134) 따라서, 위티그는 여성이 권위 있는 발화 주체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 ‘성의 범주와 그것의 근원인 강제적 이성애 체계, 둘 다 전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발화 주체의 위치를 차지할 수 없는’, ‘성별화된 존재들의 처지, 이를테면 인문학 담론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이성애 정신’(301)이 억압하는 우리 모두를, 레즈비언과 여성들을, 그리고 게이 남성들”(301~302)의 처지에 대해 지적한다. 이는 그 담론이 스스로 보편이라 주장하기 때문으로, 그 결과 사회의 기반이 되는 것, 모든 사회의 기반이 되는 것은 이성애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위티그에게 언어는 마법 같지도, 변경 불가능하지도 않다. “현실은 언어를 바꿀 수 있는 성형력(plasticity)이 있으며, 언어도 현실을 바꾸는 작용을 한다.” 언어는 발화 행위를 통해 현실에 작용하는 권력을 가정하기도 하고 또 변화시키기도 하는데, 이런 작용이 반복되면서 관행을, 궁극적으로는 제도를 침해하게 된다.(303) 정리하자면, 위티그에게 언어라는 권력은 강력하다. ‘따라서 그런 문맥에서 한마디라도 말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장하는 언어 안에 존재할 수 없는 자아를 언어적으로 주장하는 것이고, 일종의 수행적 모순이 되는 것이다.’(302)

주체의 개념에 있어서도 이리가레와 비교할 수 있다. 이리가레에게 주체는 항상 남성이다.그러나, ‘위티그는 그 주체의 개념이 전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304) ‘남성은 발화행위를 통해’ ‘보편성으로 규정된다는 것. ‘보편성을 향하거나 보편성 자체인 발화 주체는 남성으로, ‘특정하고’ ‘관여되어 있는것은 여성 화자로 규정하는 언어의 불균형적 구조는 결코 특정한 언어의 고유성도, 언어 자체의 고유성도 아니다. 이러한 불균형적 위치를 남녀의 본성에서 온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303) 위티그에게는 언어의 유연성 자체가 주체의 위치를 남성적인 것으로 고정하는 데 저항하는 것이다.(304) 말을 하는 것. 발화하는 것은 ‘“전체로서의 언어를 새롭게 전유하는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즉 말은 주체성의 절대적 행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런 주체성으로의 진입은 효과적인 섹스의 전복이자 여성성의 전복이다. 스스로 전체적인 주체, 즉 젠더가 없고, 보편적이며, 전체적인 주체가 되지 않고서, 나를 말할 수 있는 여성은 없다.” 따라서 발화를 통해 여성은 전체적인 주체가 된다. ‘위티그에게 언어의 근원적 존재론은 모든 사람에게 주체성을 확립할 동등한 기회를 준다.’(305)

버틀러는 위티그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모든 의미를 작동하고 있는 중인 차연에 입각해서 이해하려는 데리다의 입장과 달리, 위티그는 이런 발화는 모든 것에 대해 흠 없이 매끈한 정체성을 요구하고 또 소환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근본주의적 허구는 그녀에게 기존의 사회제도를 비판할 출발점을 마련해준다. 그러나 존재, 권위, 그리고 보편적 주체성은 어떤 우연적인 사회관계를 실행하는가라는 비판적 문제점이 여전히 남아 있다. 어째서 주체에 대한 권위주의적 관념의 찬탈을 높이 평가하는 것인가? ... 위티그는 그 관점을 보편화한다는 이유로 이성애정신을 비판하지만, 사실 그녀는 이성애 정신을 보편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권적 발화 행위라는 이론이 가져올 전체주의의 결과에 대해 숙고하는 데도 실패한 듯 보인다.’(306)

 

4. 몸의 각인, 수행적 전복들

 

버틀러는 진정한 섹스, 분명한 젠더, 그리고 특정한 섹슈얼리티의 범주’(326)라는 환상에는 공통적으로 ‘‘을 어떤 수동적인 매개’(327)로 하는 관습이 있다고 본다. 몸을 명백한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것일까?’(328) 심지어, 푸코까지도! “몸은 사건이 각인된 표면이다 문화적 가치 개념을 보여주는 은유들 속에서, 역사는 무자비한 글쓰기 도구로 비유되고, 문화가 등장하기 위해 파괴되거나 형태를 전환해야 하는 매개물로 비유된다.’(330)(니체, 카프카, 푸코 등의 텍스트에서.)

버틀러는 크리스테바의 비체화(abjection, 오브젝시옹) 개념 역시 주체의 첫 번째 이형이기도 한 그 몸의 경계가 설정’(355)되는 효과를 지닌다는 점에서 앞선 논의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크리스테바는 배제를 통해 분명한 주체를 구성’(335)하는 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오브젝시옹이라는 개념을 가져왔을지 모르나, 버틀러가 보기에 이 역시 난점이 분명한 것이, ‘내부외부의 구분이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희미하게 유지되는 구분선으로,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사실상 내부가 외부로 되어버리는 배설경로 때문에 혼란에 휩싸’(336)이는 문제가 발생한다. 사실상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가 완전히 구분’(336)될 수 없다.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의 구분이라니! 이 역시 현전의 형이상학의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버틀러에게 있어 몸은 내부공간으로 이해 될 수 없다.

몸을 내부공간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젠더 수행성으로 가기.젠더 트러블의 결말부의 요지로 보인다. ‘몸의 내부로 이해되는 내적 영혼에 대한 비유는, 위에 영혼이 각인됨으로써 의미화된다.’(339) 이러한 비유는 :정신 vs의미의 결여 : 의미라는 서구 형이상학의 오랜 전통을 연상하게 한다.

또한 버틀러는 몸을 젠더가 각인되는 장소라고 가정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지닌다고 비판한다. ‘몸의 표층 정치학이라는 관점에서 심리 내적인 과정을 재기술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젠더를, 환영적 비유의 규율적인 생산으로 다시 기술해야 한다는 의미를 안고 있다.’(340) 버틀러의 입장에 따르면 젠더의 규율적 생산은 젠더의 불연속성을 은폐하고, 일관성 있는 젠더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젠더는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342) 그렇다면, 젠더가 젠더의 불연속성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담론의 효과라면, 이러한 환영을 바꿀 수는 혹은 멈출 수는 없을까?

버틀러는 연기(impersonation)의 구조를 제시한다. ‘연기의 구조는 젠더의 사회적 구성이 발생하는 핵심적인 조작기제의 하나를 폭로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드래그야말로 젠더의 표현적 양식과 진정한 젠더 정체성이라는 개념뿐 아니라 내부와 외부 심리공간이라는 구분을 완전히 전복한다고 주장하고 싶다.’(342) 핵심은 패러디가 원본 없음을 폭로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버틀러가 비판적으로 읽었던 이론에서는 젠더 이분법 체계 이전의 어떤 원형으로서의 모성을 가정하거나, 젠더화되기 전의 자연으로서의 성을 가정하였으나, 버틀러는 이 모두 원본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서구 형이상학을 배경으로 한 이성애 경제체제의 원리를 드러내는 근본적인 비판이 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같은 맥락에서 버틀러가 우연성을 강조하는 부분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본적이거나 기원적인 젠더 정체성에 대한 관념은 때로 드래그, 옷 바꿔 입기, 그리고 부치/팸의 정체성에 대한 성적 양식화라는 문화적 실천 속에서 패러디된다.(343) ... 드래그는 젠더를 모방하면서 은연중에 젠더 자체의 우연성뿐 아니라 모방적인 구조도 드러낸다.(343) 사실 이 쾌감의 일부, 그 연기의 현기증은 어떤 근본적인 우연성을 인식하는 데 있다. 이 근본적인 우연성은 규제에 의해서 자연스럽거나 필연적이라고 추측되는 인과론적 통일성의 문화적 배치에 직면한 섹스와 젠더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344)

 

원본이 없는 패러디는 어떤 것일까.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란 쉽지는 않을 테지만, 이해를 위해 풀어 말해 보자면, 그것은 같은 행동도 어떤 조건이냐에 따라 다른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어떤 행동이나 조건에 대해서 같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그것은 버틀러가 강조하는 것처럼 우연성이 개입될 것이니까 말이다. 이 우연성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어떤 패러디에 대해서 계급, 인종, 출신, 그리고 젠더 정체성 등으로 국한하여 기존의 개념이나 규범 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생각된다. 그 안에는 늘 미지의 X가 개입될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우연성이 아닐까. 우리가 우연성을 계산속에 포함했을 때만이 물화된 여성성이나 혹은 특정 계급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페미니즘적 실천들이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그보다는 (앞서의 문장이 너무 규범적 혹은 단정적이란 느낌이 들어서...)페미니즘적 실천 속에는 이미 우연성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떤 매 순간 마다 이론의 적용은 그 행동을 해석하는데 조금은 모자라 보이겠지만, 그 해석 과정에서 다시 이론이 영향을 받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젠더 트러블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적어보자면, 버틀러의 이론은 (거칠게 표현하자면)‘지금 여성이 어떻게 상징계에 기입되는가혹은 여성 재현에 대한 문제를 생각할 때 중요한 참조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1장을 시작하면서 버틀러는 페미니즘 정치에 앞서 여성 주체를 가정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 이는 행위 앞에 어떤 주체가 있다는 현전의 형이상학의 전통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법 앞에 가정된 주체를 상정했을 경우, 그 주체가 어떻게 담론에 의해 구성되었는지를 가린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담론의 구성물로 결과이면서 순수한 자연을 가장하는 것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버틀러의 논의를 한국 소설 혹은 문학 장에서 여성 재현의 문제 혹은 페미니즘과 문학에 대한 몇가지 논쟁에 적용하면 어떨까. 소설이 인간이 사는 세상을 미메시스하는 장르라는 말에 동의할 때, 혹은 소설이 현실을 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무엇이 세상을 혹은 현실을 잘 그려냈느냐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런데, 간혹 이러한 논쟁 속에서 우리가 소설의 미메시스가 혹은 재현이, 간혹 원본이 있는 대상을 반복해서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읽고 난 지금, 행위 이전에 어떤 주체를 가정하는 방식, 혹은 어떤 전복을 묘사하는 것으로 정치적인 것이라고 평가하는 방식에 대해 거리를 두는 방식을 배웠다면, 이를 문학에서의 재현의 문제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라캉이 여성은 없다라고 상징계에서의 재현의 불가능성을 말했다면, 이리가레는 남성과 다른 여성의 몸을 근거로 두고 여성은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이전의 틀을 전복하려고 했다. 그리고, 다시 버틀러는 여성은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닌 제 삼의 항, ‘젠더는 패러디다라고 말한다. 이 세 번째 항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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