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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6주차 쪽글] 본질의 형이상학에서 계보학적 실천의 사유로2018-11-09 15: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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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시간이 없어서 1.6장을 뺀 1.5장까지 부분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올립니다...


본질의 형이상학에서 계보학적 실천의 사유로 

<젠더 트러블> 1.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

 

버틀러는 페미니즘의 주체로서 여성을 가정하는 것을 비판한다. 여성은 여성이라고 명명되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일될 수 없다. 억압받는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기 위해 여성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는 순간 다시금 자신들이 벗어나고자 했던 규범에 묶이게 된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근거한 페미니즘 운동은 특정하게 규정된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이에 벗어나는 여성은 포함될 수가 없다. 따라서 여성을 주체로 세우는 것은 이성애 중심의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차 인식론에 흡수되어, ‘여성들가운데 어떤 존재들을 배제하게 된다. 남성이 인정하는 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보편적 여성상을 가정하여 이를 주체로 세우는 것은 합당한 인식이 아닐뿐더러 좋은 투쟁의 전략도 아니다.


 페미니즘의 운동에서 주체를 강조하는 경향은 섹스와 젠더의 개념적 분리와 연관이 깊다. 간략히 말해 섹스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성이고 젠더는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성인데,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여성 해방은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젠더의 영역에서 남성이 설정하는 여성의 자리를 벗어나 여성 주체로서 자신을 확보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 버틀러는 과연 젠더만 구성되는 것이고 섹스는 주어지는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냐고 질문한다. 구성의 영역을 문화적 차원으로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차원으로 간주되는 섹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질문을 던져야한다. 버틀러가 보기에 섹스는 젠더화된 범주다. 따라서 섹스를 자연화하려는 생각 자체가, 즉 섹스를 비젠더적인 자연으로 은폐하려는 것 자체가 (이성애적) 젠더 장치의 효과다.


 섹스와 젠더의 분리는 본질의 형이상학과 연관이 깊다. 버틀러는 젠더를 둘러싼 논쟁을 보부아르와 이리가레와 대비하여 설명한다. 보부아르에게 젠더의 표식은 여성에게만 해당한다. 왜냐하면 남성은 젠더가 아니라 보편성으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보편성이 아닌 여성은 육체로 체현된 존재로 드러날 뿐이다(육체를 초월한 보편적 존재로서의 남성 vs 육체로 체현된 여성). 한편 이리가레에 따르면 남성이나 여성이나 이성애적 의미화의 체제 속에선 젠더의 표식이 드러나지 않는다. 즉 보부아르의 견해와 달리 이리가레는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조차 육체로 체현되지 못한다. 여성은 (가부장적)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라는 이성애적 의미체제의 질서로부터 벗어나야지 만이 사유될 수 있다. 이처럼 보부아르는 보편적 남성(정신)과 육체적 여성이라는 이원화된 틀 속에서, 이리가레는 남성과 여성 모두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라는 하나의 보편적 의미체제에 흡수된 일원화된 틀 속에서 사유하고 있다.

  

 두 사상가에 대한 버틀러의 코멘트는 다음과 같다. 일단 보부아르는 앞서 자연/젠더의 이분법을 비판했던 맥락과 같이, 육체와 정신이라는 서양철학의 오래된 이분법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반면 이리가레는 이런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억압의 체제를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라는 하나의 의미 체계로 만들었는데, 버틀러가 보기에 이는 인식론적 제국주의다. 오래된 인류의 역사와 전지구적 상황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분리와 이에 따른 여성의 억압을 어떻게 하나의 단일한 억압 체제로부터 설명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이는 현실과 맞지 않을뿐더러, 억압 체제를 너무나 보편적인 전능성으로 설명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버틀러가 보기에 보부아르와 이리가레 모두 본질의 형이상학에 빠져있다. 보부아르는 육체와 정신이라는 본질을 기준으로 성차를 설명하며, 이리가레는 억압의 체제를 단일한 본질로 설명한다. 따라서 본질의 형이상학에 빠지지 않고 젠더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젠더를 실천의 결과물로 사유하는 계보학이 필요하다.

  

 버틀러는 니체의 계보학을 가져와 주체 없는 행위로 젠더를 설명하고자 한다. 니체에 따르면 행위의 이면에 깔려 있는, 행위를 주관하는 행위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행위자는 행위를 통한 사후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젠더 역시 어떤 술어들로 미리 규정된 명사가 아니다. 젠더는 젠더적인 행위들을 통해 구성될 뿐이다. , 자유로운 주체가 젠더를 실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젠더를 규정짓는 구조가 젠더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젠더는 젠더를 규정하는 행위의 반복으로 구성된다. 즉 버틀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주체 혹은 이성애적 억압 체제라는 본질주의적 가정에서 벗어나, 젠더를 가능하게 하는 실천을 통해 억압과 해방을 모두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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