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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4주차 쪽글] 금지에 대하여 2018-10-26 1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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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 루빈의 <성을 사유하기>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섹스-젠더 체계를 기반으로 펼쳐지고 있는 성적 억압에 대해서 비판하고 이 틀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도

성별 이분법적 페미니즘이나 성적 자유에 대한 검열에서는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한다.

더하여 루빈의 글을 읽고 있는 독자는 당신의 페미니즘이 어디쯤에서 어떤 괴리에 빠져있는지 눈치챘냐고 채근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예리한 부분은 페미니즘 내에서도 성행위에 대한 위계가 존재한다는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양성평등이 아니라 성평등의 페미니즘이라고 2018년의 페미니즘 운동은 주장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투쟁은 성적 억압을 받고 있는 생물학적 여성에 의해서 강하게 추동되고 있지만

페미니즘만이 할 수 있는 성적 억압에 대한 거부는 성평등이라는 용어를 채택하는 것으로 변경이 넓혀졌기 때문이다.

이는 페미니즘이 리부트 된 2015년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섹스-젠더 체계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는 주체인 LGBTQ(+) 등은

게일루빈이 <성을 사유하기>에서 성 전쟁으로 다루는 1950년대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게일 루빈이 다섯 가지 성 부정성으로 정리한 내용 중에서도 성행위에 대한 위계적 가치 평가는 특히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도 작동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랬기에 국내에서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담론화가 아직도 부진하게 진행된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성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사유는 본능과 본능 억제 모델 속에 스며있다.

그리고 성 억압이라는 개념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생물학적인 이해 내부에 있다.

잔혹한 탄압 아래 놓인 본능적 리비도 개념에 기대는 것은 구성주의적 체계 안에서 성 불평등이라는 개념을 재설정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구성주의적 체계 안에서 성 불평등이라는 개념을 재설정해야 한다.

성적 배치에 관한 푸코의 개념적 정밀함과 빌헬름 라이히의 선동적 열정을 겸비한 급진적 비평이 절실하다. (298)

   

 

역사적으로 보면 페미니즘은 금지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 같다.

동거-일대일관계-레즈비언(게이)의 성적 실천을 섹슈얼리티의 위계의 상층부에 놓으면서 변이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취급하기를 꺼려왔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동성애와 근친혼 금지를 가리키면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우울증적 동일시를 통해 젠더가 어떤 주체를 만들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버틀러의 논의 속에는 여러 중요한 발상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아동이 여성이 되면서 겪는 이중의 금지에 대한 설명을 통해

강제적으로 포기되고 폐제되는 섹슈얼리티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한다.

 (동성애와 근친혼의 금지는 게일 루빈이 먼저 <여성 거래>에서 이론화한 내용이지만) 이론에 따르면 금지그 자체는 젠더를 획득하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필수적인 관문이다.

 이는 성애의 대상을 금지하면서 특정 섹슈얼리티를 강조하고 이외의 실천은 부정해야 할 것으로 간주하게 했다.

자연적인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본능은 억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금지와 억압의 메커니즘은 페미니즘이 없애고자 했던 가부장제적 이성애의 메커니즘과도 다르지 않은 면이다.

특정 섹슈얼리티만이 인정받을 수 있게 하며 일탈적인 섹슈얼리티를 생산하는 동시에 범죄화하기 때문이다.

루빈이 언급했던 페미니즘 이론의 보수화는 특정 시기만의 문제는 아니다.

급진적 페미니즘이라고 자처하는 집단에서도 섹스-젠더 체계의 문제에 국한하여 전선을 긋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성매매 관련 종사자인 여성은 섹스-젠더 체계의 유지에 복무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페미니즘이 그은 선의 밖에도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루빈은 이처럼 자신의 성적 지향으로 인해 도덕적 공황의 증거가 되고 성적 박해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을 포함하는 이론으로 성적 다원주의뿐만 아니라 이론적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정치 체계에는 섹슈얼리티의 권력 체계가 구조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역사적으로 금지에 대하여 이야기할 기원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성 본질주의적이지 않은 성적 실천, 포르노그라피, S/M금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어왔다.

쪽글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게일 루빈은 페미니즘 안에서 독자가 어떤 아포리아에 빠지고 있는지를 깨닫기를 촉구한다.

나는 이 글에서 금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푸코가 말해왔던 규율권력그리고 그것이 생산해내는 주체는 금지에 의해서 생산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포르노그라피를 금지라는 규율을 통해서 전달받았다. 그런 점에서 포르노그라피를 포함한 이탈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특정 섹슈얼리티와 실천은

이 세계의 페미니즘 주체가 되기를 희망하기 위해서 부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여성의 상품화와 젠더 위계를 보여주는 산업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루빈은 여러차례 조소하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재현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방조하는 것은

비정치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이 포르노그라피적인 것이길 바라는 존재는

금지부정의 대상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늘 명쾌한 대답을 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섹슈얼리티라는 것이 닫아 놓은 이제까지의 세계와 섹슈얼리티를 다시 열어놓으려는 현재의 시도에 있어서 페미니즘은 비평의 방식으로 개입하고 있다.

(설리, 위안부 등에 대한 성적 재현에 대한 논의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여기에서 어떤 이론과 자리로 나아갈 것인가는 내게 있어서 오래 고민하는 부분이다.

(루빈을 따라) 어떻게 비평할 때 섹슈얼리티 그 자체가 던지는 정치적인 다원성의 질문을 잘 받아낼 수 있을까.



이를테면 포르노그라피적으로 자신을 현시하고자 하는 존재에게 있어서 적은 포르노그라피를 불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 특정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불법 몰카, 스튜디오 단체 촬영) 생산자이다.

이들은 금지자체를 마치 자신들의 놀이터라고 생각하며 금지의 확장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서 젠더 폭력을 유포한다.

페미니즘에서 확장된 섹슈얼리티 논의가 성법이 폐제하고 있는 성적 지향을 폭로하고 있는 현실의 반대편에서는 한편,

개인의 신체에 대한 통제권을 불법으로 탈취하는 이들이 있고 이는 성법의 존재를 필요로 하게 한다.

이런 아포리아를 마주 하면서 페미니즘의 섹슈얼리티 주장은 금지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지 정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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