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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주차 쪽글] 이성애의 정치경제?2018-10-19 17: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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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학교] 3주차 쪽글 | 20181019 | 전주희


1) 이성애의 정치경제?


우리 사회가 강력하게 이성애 중심주의를 재생산한다고 했을 때, 이성애는 어떠한 정치경제를 구성하는가? 이는 어떤 사회적 효과를 나타내며 나아가 어떻게 정치적, 경제적 과정과 맞물리며 오늘날의 정세를 규정하는가?

루빈이 <여성거래>를 통해 제기하려는 성의 정치경제는 단순히 여성 억압의 인류학적 기원을 탐색하려는 시도로 제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에 대한 경제적 억압은 부차적이고 파생적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섹스/젠더의 경제학이 아니라 “성적 체계들의 정치경제학”이 필요하다.(114)


우리는 가부장제나 성차별로 흔히들 표현하는 여성차별의 문제로 곧장 나아가는 것을 멈추고, 이 사회가 이성애중심주의를 표방함으로써 획득하게 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효과들, 그리고 정치경제 메커니즘에 이성애중심주의가 맞물리면서 작동하는 특정한 착취와 억압의 형태들을 분석해야 한다. 

이성애중심주의는 맑스주의적 도식에서 토대와 상부구조로 이야기되는 경제와 정치, 문화적 구조 중 단지 문화적 금지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성애는 어떠한 심급에서 작동되는가. 


루빈은 인류학적 분석을 통해 이성애가 구축되는 과정과 친족이 구성되는 과정을 추적하며 섹스/젠더 체계가 특정한 사회화 과정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음을 파악했다. 이는 두 가지를 시사하는데, 성을 둘러싼 인식, 행동들은 항상-이미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며, 연루의 과정에서 성을 둘러싼 금지와 배제, 포함 등의 차별화의 과정이 포함된다는 점이다. 


이런 한에서 루빈이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의 개정판을 써야한다는 것으로 끝맺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페미니즘은 그러한 차원에서 성의 억압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이 있어왔지만, 성이 착취의 차원에서 갖는 문제는 더디게 전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착취와 억압의 변증법이라는 새로운 ‘성의 정치경제’를 구축해야한다는 점은 더더욱 멀게 느껴진다. 


2) 알튀세르의 호명이론과 우울증적 주체. 


이 지점에서 버틀러는 ‘이성애’ 문화가 작동했을 때 그것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그리고 남성과 여성 등 ‘성적 주체’(따라서 모든 주체)들 모두가 우울증적인 문화 안에서 우울증적인 주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물론 우울증적인 주체는 이성애 문화가 사라지고 동성애 금기가 사회적으로 해체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양상으로 등장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슬픔을 투명하게 슬퍼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는 없다. 혹은 그러한 한에서 개인은 주체로 성립되지 않는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금지가 특정한 우울증적 주체를 생산한다는 점이며, 이런 한에서 동성애 금지는 동성애-이성애를 관통하는 당대의 매우 핵심적인 주체화 기능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공통적이면서도 상이한 우울증적 주체가 출현한다는 점이다. 


버틀러의 우울증적 주체를 알튀세르의 주체와 대비해보면, 비록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응답하는 주체화가 성공하더라도 그 주체는 여전히 우울증적 주체인 한에서 호명되는 것이다. 나아가 호명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과정은 이러한 우울증적 주체화의 과정에서 어떤 효과를 미치게 될까? ‘결코-결코’의 이중부정이 이성애 주체를 만들어 낸다고 할 때, 이때 주체는 체념을 고착화하면서 결국을 우울증이라는 증상을 봉쇄하거나 말라 비틀어버리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체념을 강박적으로 반복하면서 또다른 강박적 주체가 되는 것일까?

그래서 결국은 우울증적 주체로서 이성애는 한편으로는 ‘체념’적 주체로 고착화되면서 자신의 우울증을 말라비틀어버리게 한 채로 자신안에 가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체념에 대한 반복 강박을 못견디고 분열적인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이성애 중심주의를 깨려고 할 때 이성애 내부의 붕괴가능성은 어떻게 찾아질 수 있으며, 또한 동시에 동성애가 자신의 슬픔을 적극적으로 사회화할 때, 이성애 내부의 반동성과 교란가능성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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